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바 도독부 (문단 편집) === 10년 전쟁 ~ 쿠바 독립 전쟁 === 10년 전쟁(Guerra de los Diez Años)은 [[1868년]]부터 [[1878년]]까지 10년 동안 쿠바인들과 스페인 본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스페인 제국의 가혹한 무역관세제도, 노예 제도 등으로 쿠바인들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기득권을 형성하게 된 크리오요들, 쿠바에 정착한 스페인 본국 출신 백인들인 페닌술라르들이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쿠바의 독립 움직임은 다른 중남미 식민지들에 비해 늦게 나타났다.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중반, 설탕산업의 기계화를 계기로 변화하게 된다. 설탕산업의 대규모화, 자본화는 크리오요들 사이에서도 양극화 현상을 일으켰고, 비대해진 설탕산업을 감당하기 위해 더많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 노예무역을 폐지하라는 영국의 압박 때문에 크리오요들은 중국으로 눈을 돌려 19세기 중반에는 약 10만 명의 중국인들이 쿠바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는 조건에서 일했다. -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4, 40] 주력산업이 발전하게 쿠바는 자연스럽게 국제무역구조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변화로 스페인 제국은 더 이상 쿠바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경제적 영향력 상실은 정치적인 영향력 약화로도 이어졌다. 결국, 그동안 쌓인 불만과 식민지 본국의 영향력 약화로 쿠바인들은 서서히 독립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1867년]] 스페인 본국은 도리어 쿠바에 반동적인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서 전보다 많은 세금을 증세하자, 쿠바 내 자유주의자, 개혁주의자, 독립주의자, 중소규모 농장주, 노예제 폐지론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반스페인 운동을 일으켰다. [[1868년]], 쿠바의 설탕 농장주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 del Castillo)를 중심으로 크리오요들이 10년 전쟁이 일으켰다. 세스페데스는 '야라의 외침(Grito de Yara)'을 발표하고 자신의 노예들을 풀어주면서 쿠바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다. 여기에 쿠바 독립운동가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seo)가 합류하였다. 세스페데스는 쿠바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스페인에게 저항하였다. 200여명으로 시작된 이들은 1개월 이후 1만 명의 대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적 크리오요들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해방된 유색인들이 주체가 된 이 세력은 승승장구하였다. [[1869년]], 임시정부는 세스페데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중심의 쿠바 공화국은 스페인 제국을 지지하는 쿠바 내 지주들을 의식하여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때문에 노예제 폐지론자, 노동자, 농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전쟁이 쿠바 공화국과 스페인 제국 양쪽이 비등한 상태로 10년 동안 지속되자, 쿠바의 보수적 지도층은 [[1878년]] 산혼조약([[영어]]: Pact of Zanjón, [[스페인어]]: Paz de Zanjón)[* 10년 전쟁을 종결시키는 대신, 스페인 본국이 쿠바의 독립운동가들을 사면시켜주고, 노예제도 철폐, 쿠바인의 의회 대표권 인정 등 정치개혁을 약속한 조약]을 맺어 전쟁을 사실 상 종결시켰다. 10년 전쟁 종결 이후, 쿠바 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1886년]] 산혼조약에 따라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유했던 쿠바의 지주들은 몰락하고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쿠바의 설탕산업에 [[미국]]의 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쿠바는 사실 상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80년대 이후 [[미국]]은 미국의 해외 영토와 시장 확보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70년대 [[남북전쟁]]의 후폭풍과 그로 인해 미국 경제가 겪었던 공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 사회는 시장 확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895년]], 쿠바의 지식인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José Julián Martí Pérez)를 중심으로 쿠바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는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894년]] 쿠바 혁명당을 조직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다. 호세 마르티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페인군의 기습을 받아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쿠바 독립 전쟁은 10년 전쟁과 다르게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쿠바 독립 전쟁은 미국 내 신문들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보도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스페인을 쿠바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잔인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여기고 분노하게 되었다. 급기아 [[윌리엄 매킨리]]는 [[1896년]] 선거에서 쿠바 독립 문제를 공약으로 꺼내들게 된다.[* 그러나 매킨리와 공화당의 쿠바 독립 이슈는 여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고, 선거 운동 과정이나 결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는 그 당시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먼로주의에 충실했고 다른 유럽 열강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김봉중, 2002, 760-76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